2009년 8월 13일

창공을 나는 아름다움, 전통 연(鳶)


http://ssairen.tistory.com/43?srchid=BR1http%3A%2F%2Fssairen.tistory.com%2F43


창공을 나는 아름다움, 전통 연(鳶)

한국 연의 역사를 문헌에서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 전 신라 진덕여왕 원년인 647년에 비담(琵曇)과 염종(廉宗)의 반란 시 김유신 장군이 연을 사용했다는 기록이『三國史記列傳』이 최초로 문헌에 나타나는 연의 역사다. 이후 고려 말엽(西紀 1374年) 최영 장군이 탐라국 평정 시 군사를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에 띄워 절벽 위에 상륙시켰으며, 불덩이를 매단 연을 적의 성안으로 날려 보내 불타게 하여 공략하였다는 기록이 『東國歲時記』에 적혀있다.

조선조에는 세종대왕(西紀 1455年) 때 남이 장군이 강화도에서 연을 즐겨 날렸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수단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했다는 사람들의 구전 기록 등이 전해진다. 특히 영조대왕은 연날리기를 좋아하여 즐겨 구경하고 장려하여 1725년~1726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 연날리기가 널리 민중에 보급되어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1954년 민족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연날리기를 장려하여 당시 공보부에서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연 제작 기능보유자들을 수소문하여 연날리기 대회를 광복 후 처음으로 열게 되었으며, 그 후 1956년 한국일보사 주최로 제1회 전국연날리기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이승만 전 대통령도 매년 대회장에 나와 관전도 하고, 연도 날리며 연에 대한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때부터 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연을 수집, 제작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오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오는 민족 전래의 연날리기는 연줄을 한없이 풀어내는 이유도 주위에 장애물이 없는 청계천변(서울), 개울가, 동산(시골)에서 많이 날렸는데 그 시기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대보름까지가 본격적이며 특히 대보름 며칠 전에는 구경꾼들의 성원과 열기가 절정에 달해 장관을 이루었다.

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 며칠 전에 큰 성황을 이루지만 대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는 것이 본래의 풍속이다. 대보름이 되면 ‘액연 띄운다' 하여 연에다 ’액(厄)‘자를 쓰기도 하고 ’送厄‘이나 ’送厄迎福‘이라고 써서 얼레에 감겨있던 실을 모두 풀어 멀리 날려 보낸다. 이것을 '액연 띄운다', 혹은 '액연 날린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연은 기록에 의하면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연날리기를 놀이로 삼게 되었고, 그것이 민속과 결합되어 조선 시대에 들어와 연을 날리는 시기가 섣달부터 정월 보름 사이로 고정되었다. 이는 한국의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경기에 연날리기를 하면 농사에 지장을 줄 것으로 보고, 농한기인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즉, 정월 보름날 액막이의 민속과 관련시켜 연을 날려 보냄으로써 연날리기를 끝내고, 다시 농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강변 등 넓은 공간과 알맞은 바람(초속 3~5m)만 있으면 연중 어느 때라도 연을 날리는 새로운 풍속도가 그려지고 있다.

민속연 기능보유자 노유상 옹은 1993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호 한국민속연의 보유자로 지정되어 한국정통연의 맥을 잇고 있다. 올해 104세인 노유상 옹이 본격적으로 연에 관심을 갖고 제대로 연을 만들어 날리게 된 것은 15살 무렵 박근석(朴根錫) 씨를 만나면서부터인데, 그때 연 만드는 기술뿐만 아니라 날리는 기술, 얼레(연자세) 만드는 기술, 연줄에 사기를 먹이는 기술, 상대편의 연줄을 끊는 연싸움 기술 등 연에 대한 대부분의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90년이 넘게 연을 만들고 날려 온 노유상 옹이 지금까지 만든 연은 100여 종에 다다른다. 노유상옹의 연 제작 기능은 아들 노성규씨에게 전수가 되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 현재는 3대를 잇는 노순씨가 민속연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