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8일

장을 따뜻하게하는 음식

장을 따뜻하게하는 음식



인삼, 잣, 호두, 꿀.....등등


이런것들이 좋습니다
그런데 냉 때문에 고생하신다면
구절초를 적극 권장해 드립니다
진하게 다려서 아침,저녁에 한잔씩
드시면 복용 2주후면 확실히 좋아집니다


대체로 따뜻한 음식은 곡식류는 쌀,찹쌀,조,감자 등이 있고 육류로는 닭고기,개고기,노루고기,참새고기,염소고기,양고기등이며 해물류는 명태,도미,조기,멸치,미꾸라지 그리고 채소류는 미나리,양배추,파,마늘, 생강,시금치등이며 과일류는 사과,복숭아,참외등입니다.
항상 이런 여러가지 음식들이 골고루 필요하며, 혹은 몸의 상태에 따라 필요한 음식은 몸에서 저절로 당기게끔 되어 있읍니다.

한약을 복용할 때 음식을 가리라고 말하는 것은 대체로 약에 들어간 특수한 한 두가지 약물의 부작용을 우려한 경우이거나 환자의 소화력이 부족해서 만약 체증이 생긴 다면 곤란해서 소화가 잘 안되는 음식을 가리라고 적어 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실제로 그 음식이 아주 나쁜 영향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속이 찬 사람이 너무 차가운 아이스 크림이나 냉면을 먹는다면 당연히 설사를 한다거나 하는 탈이 나겠죠. 그러니까 약간 따뜻한 음식을 먹어 주는 것이 소화에 도움이 되니까 찬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다시 말씀드리면 소화력이 약하신 분들은 소화가 잘 안된다고 생각하시는 음식을 가리시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음식이 기름끼 많은 음식이나 질긴 음식들입니다. 질긴 음식은 오징어,문어,조개류등이 있읍니다. 그리고 평소 속이 차서 차가운 음식을 드시면 설사한다거나 하시는 분은 당연히 찬 음식은 가리시는 것 역시 중요하죠. 한약을 드실 때 음식을 가리시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입니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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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대장은 정상적으로 하루 1회 정도는 배변을 유도하거나 움직입니다.
하지만 대장이 과민해진 경우 설사가 유발되거나 또는 반대로 움직임을 급격히 멈춰 변비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설사와 변비, 복부 통증의 증상을 볼 때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조심스럽게 생각이 됩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의한 설사는 아침 기상 시, 또는 아침 식사 후에 악화되는데 과다한
점액을 포함한 묽은 대변을 3, 4차례 본 후에 좋아지며 그 후 하루 동안 편안해 집니다.
그러나 소량의 음식이나 장내의 가스로도 증세가 악화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증상이 올 수 있습니다.
배에 가스가 차거나 아래배의 통증이나 불쾌감이 있습니다.
장의 운동이 갑작스럽게 너무 빨리 일어나 '장경련'이라고 부르는 격심한 복통이 발생합니다.
배변을 한 후에도 계속 변이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있거나, 자주 변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배가 싸르르 아프고 부글거리는 소리가 나다가 변을 보면 편해진다. 좌 하복부의 경련성 복통이 소량의 배변이나 방귀로도 사라집니다.
설사와 변비가 반복됩니다. 트림, 속쓰림, 구토, 잦은 방귀 점액성의 대변이 나옵니다.
이중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나는지 한번 확인해 보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위 증상 중 많은 부분이 나타날 때 에는
식사를 소량씩 자주, 규칙적으로 천천히 먹어야합니다.
이렇게 하면 소화기관의 과잉자극을 줄일수 있고, 비정상 수축을 조절할수 있습니다.
음식 알레르기에 의해 장경련이 악화될수 있으므로 알레르겐 식품, 쵸코렛, 튀김류, 치즈, 버터 마가린, 육류는 피해야 합니다.
유제품등 지방이 많이 포함된 식품을 장경련이 나을때까지 피합니다.
과일, 채소의 섭취를 늘리고 유산균이 풍부한 요구르트 그리고 장을 위해 정장제 등을 먹어야 합니다.
정장제 중에는 미야리산유,비스칸정,라이켄등등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미야리균은 유익균인 비피더스균의 발육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중식을 촉진시킵니다.
정장제의 중요한것은 장까지 살아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미야리이균은 일반적인 유산균과 달리 아포에 둘러싸여 있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강한
산도의 위액에도 죽지 않고살아있는 상태로 장에 도달합니다.
유산균을 섭취하셔도 살아있는 유산균을 섭취하는것이 좋습니다
가스를 많이 배츨 할 수 있는 식품인 밀가루, 땅콩, 양파등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장운동에 영향을 주는 카페인 함유 음료, 인공감미료가 포함된 식품은 피합니다.
비타민 A, B-com, 아연등은 도움이 될수 있으니 복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체력저하나 스트레스등은 장경련을 악화시키니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배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스크림, 찬음식은 되도록 피하시고 배를 최대한 따뜻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2008년 11월 12일

거위의 꿈

2008년 11월 16일
거위의 꿈
시편 34:22, 요한1서 3:1~3, 마태복음서 5:1~12

<세 가지 놀라움>
언젠가 천국에 도달한 사람에겐 세 가지 놀라움이 기다린다고 누군가 말했다.
첫째, 자신이 거기까지 갔다는 것. 둘째, 천국에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 있다는 것. 셋째, 반드시 천국에 갔을 거라고 확신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 없다는 것.
어쨌거나, 누가 천국에 있고 없을 거라는 걸 셈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느니, 스스로 천국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것을 제안한다. 동시에, 영원한 평화에 다다르기 위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도우라.(J. 모러스, 『오늘은 우리의 것』)
어느 사형수의 최후의 5분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28년을 살아온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의 5분은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사형수는 고민 끝에,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 최후의 순간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나가 버린 28년이란 세월을 금쪽처럼 아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다. 아! 다시 한번 인생을 더 살 수만 있다면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 후 구사일생으로 감옥에서도 풀려 난 그는 사형집행 직전에 주어졌던 그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 순간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다. 그 결과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등, 수 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하여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성장하였다. 그 사형수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였다.
흔히 인생을 일장춘몽이라 말하며, 꿈 한 번 꾸는 것처럼 짧다고 한다. 그러나 사명을 감당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인생은 결코 짧지 않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한 평생 자신을 바쳤던 슈바이처 박사의 일생이나, 인도 빈민가에서 한 평생 자신을 드렸던 마더 테레사의 일생과 같이 7~80년 살았지만,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살았던 사람의 일생과 그 길이가 과연 똑같을까? 80~90세 장수의 복을 누렸어도, 일생을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살았다면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맞다. 그런 사람의 삶은, 아무리 길어도, 결국은 '짧고' 헛된 것이 되고, 아직 미련이 많이 남아 더 살아야겠다는 욕망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사람들은 물질에만 5병2어의 기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것만을 바란다. 그러나 시간에도 5병2어의 기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24시간을 1초도 안 되는 시간으로 의미 없이 탕진해 버린다. 그러나 남과 같은 24시간을 사흘이 되는 길이로 충분히 의미 있게 사는 사람이 있다. 남이 사흘 걸려 하는 일을, 하루 만에 끝내면, 그는 남보다 3배를 더 산다. 바로 이것이 시간의 5병2어의 기적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것, 그래서 많은 양의 결과를 낳는 것이 5병2어의 기적이라 할 수 없다. 결과의 양이 아니라, 의미라는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 때, 시간의 5병2어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오늘날 음악을 전공한 어떤 학생이 바하나 헨델이 작곡한 곡들을 모두 백지 오선지에 깨끗하게 베껴 쓰는데 일평생 걸린다고 한다.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루터는 많은 원고를 썼다. 많은 책들이 발간되었다. 그렇지만 지금 독일에는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는 루터의 원고가 존재한다고 한다. 마틴 루터가 썼던 모든 원고들을 독일인이 독일어로 베껴서 옮기는데 평생이 더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바하, 헨델, 마틴 루터는 밥만 먹고 작곡, 집필만 했느냐? 아니다. 가족도 돌보고, 친구도 만나고,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했다. 자기 할 일 다 하면서도, 남이 옮겨 적는데 일평생 걸리는 큰 업적을 쌓았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그들에겐 시간의 5병2어라는 기적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도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수상자가 일본인으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금년에 4명을 합해서, 이제까지 모두 18명의 일본인이 노벨상을 받았다. 일본은 일찌감치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백년 전부터 이 분야에 집중 투자해 왔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GDP(국가총생산량)의 2%를 기초과학 분야에 투자해왔다. 일본이 세계 2위권 경제규모를 감안한다면, 대단한 액수이다. 약 20년 전부터 집중 투자하며 육성한 열매가 오늘날 차츰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했고, 잘 사니까 그런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당장 어려워 죽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는 세계 10위권이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미국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미국 대학교 관계자들이 놀라고 있다. ‘어떻게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공부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최근에 하버드 대학교에 석사 논문 한 개가 발표되었다. 조사 기간 중에 미국에 명문 대학에 입학한 한국 학생들 숫자가 약 1천4백 명 인데, 그 기간 동안 중도 포기한 학생이 44%나 되었다고 한다. 한국 말고도, 이스라엘, 인도, 중국, 학생들을 조사해 보았는데, 그 중에 유대인들은 12.5%가 중도탈락, 인도인들은 21.5%가 중도탈락, 중국인들은 25%가 중도탈락, 그런데 한국은 그런 나라 학생들보다 약 두 배로 중도탈락했다.
그 논문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 학부모들의 지나친 입시 위주의 교육 방식 때문이다.” 부모가 “너 거기 들어가야 성공한다”고 너무 다그쳤던 것이다. 자녀들도 “거기만 들어가면 다 되나 보다...”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막연하게 그 대학에 입학하는 것만 목표로 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고, 어떤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던 좋은 직장에 들어 가는데 인생의 목표를 둔다. 만약에 ‘내가 왜 이 대학교에 입학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 전공을 택해서 그 저명 교수 밑에서 배워야 하는지...’, ‘이 대학을 마치고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이런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더라면, 중도탈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연하게 ‘그 대학에 입학하기만 하면, 나는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 라는 생각만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온 다음에는 도중에 하차해 버린다는 것이다. 대학공부와 생활에 대한 목표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학교의 입학처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회는 남을 위하여 작은 것이라도 희생할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희생정신을 가진 리더십을 요구하고 환영합니다. 학문적으로 뛰어나다 해도 사회생활에 서툰 사람, 또는 편협한 학생들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한국은 ‘공부만 잘 하면’ 어디 가든지 환영 받는다. 그런데 거기에 가 보니, 아니더라는 것이다. 자기를 환영해 주고 떠받들어 주는 사람은 한국처럼 많지 않았다. 아무도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해 버린 것이다.
내 인생은 결코 짧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감당할 충분한 시간을 내게 주신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하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조차 은혜에 감격스러운 것이다. 우리에게 아직 시간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빈다.


엎드림.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내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더욱 처절하게 느낀다.

내 마음 속에 잠깐이라도
이기심과 교만이 파고드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다시 육신의 사람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엎드려
"나를 비우고 내 자신을
포기할 수 있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내가 이기심과 교만을 포기하는 매 순간마다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임하신다.

그때 비로소 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무디>

2008년 11월 9일

레이니즘



비의 레이니즘

2008년 11월 9일
레이니즘
말라기서 4:1~2, 데살로니가후서 3:9~13, 누가복음서 21:12~19
1. 구상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가고,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참고 견디는 가운데 우리의 목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절제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면서 선한 일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2. 설교
요즘 ‘비’라는 가수가 부른 ‘레이니즘’이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다. 레이니즘은 가수 비가 자신에 대해 부르는 가사의 노래여서 레이니즘이라 이름 한 것일 것이다(doctrine, 교리).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가수 비의 레이니즘은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작은 이야기에서이다.
비가 ‘무릎팍 도사’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 자신을 이끄는 원동력은 바로 어머니라고 말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 사랑을 위해 희생했던 자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말하면서이다. 비는 “투병을 하면서도 자식들에게 밥 한끼를 먹이기 위해서 부은 몸을 이끌고 일을 하시던 어머니의 고통을 봤다. 당시 어머니는 당뇨를 앓고 계셨는데 인슐린 살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못 받고 가신 것 같아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이어 “2000년 12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나가신 상황이었고, 내가 우리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집에 돈이 없어서 굶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19살 때 공사판에 가서 일을 한 적도 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찾아온 시련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말한 비는 “장례식 후 집에 들어와 원망스러운 마음에 가구들을 부수고 집어 던졌는데 침대 밑에 어머니가 남겨 놓으신 편지와 통장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고통을 견뎌가며 자신을 위해 인슐린 등 치료를 받지 않고 남겨진 자식을 위해 돈을 남겨두신 어머니로 인해 다시 마음을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가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사장인 박진영 앞에서 몇 시간을 춤을 춘 후 그의 연습생으로 들어가 오늘에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 가수 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아픔의 깊이 만큼 지금 월드스타라는 성공의 닉네임을 붙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레이니즘’이다. 골이 깊은 만큼 산도 높다는 것이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고를 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듣고 있는 제자들에게 세상 종말에 대한 물음, 즉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마지막에 우리 앞에 현실로 올 때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나중에 일어난 유대전쟁(주후 66~70년)의 참극에서는 성전이 파괴되는데, 성서에 표현된 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얹어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예수는 이에 대한 징조로 누가복음서 21:8에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다' 하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들은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고, 너희를 회당이나 감옥에 고발할 것이며, 예수의 이름 때문에 왕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들과 총독들, 그리고 감옥에 끌려가는 일 때문에 오히려 증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고 한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끌려갔을 때 쓸 수 있는 증거이다. 그것은 예수를 위한 증언이다. 그들은 유대인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의 행정관들과 임금들 앞에서 그리고 세상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증언해야 한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는 누가복음서 21:14에 “너희는 변호할 말을 미리부터 생각하지 않도록 명심하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먼저 생각해 낸 것은 인간적인 변명이요, 구차한 자구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에게 주는 구변과 지혜는 ‘모든 적대자들이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고 한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많이 욕을 먹고 있는 형편이다. 기독교가 욕을 먹는 이유는 기독교가 있어야 할 자기의 자리에 올바로 서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때문에 지금의 시대를 “예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산다”고 결론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 3:10을 통하여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자기의 주장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는 진심 어린 충고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말하는 데살로니가후서 3:11의 말씀을 들어보자. “그런데 우리가 들으니, 여러분 가운데서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하며, 또 권면합니다.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십시오.” 하는 것이다.
지금 말라기서에 나온 데로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다가오는 긴박한 이 순간에도 개인적인 비리로 악취가 풍기며, 사회의 약자와 억울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억누르고 빼앗아 성공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을 입었다’ 찬양하는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권면하는 사도 바울의 “무절제하며 일을 만들기만 하고, 책임은 지지 않고 있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기독교는 세상을 향해 무언가 진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파렴치하다는 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처럼 그렇게 단순한 세상이 올까? 오늘 말라기서 4:1~2에 보면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오는데, 어떤 사람을 불에 살라버릴까? 그것은 바로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교만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훌륭한 언변으로 우리를 위해 변호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를 비판하는 세상과 싸운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방법 밖엔 되지 않는다.
가수 비의 레이니즘은 춤을 추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통해 자신을 꾸준히 준비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레이니즘은 참고 견디는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구원 받아, 새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견디는 방법에 대해 도가 트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고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고 견딜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일생 동안 가장 많이 사는 곳이 집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집에서 살다가 집에서 그 인생을 마친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집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집을 건물로 생각하고 살지만, 사실은 건물이 집이 아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품’이 나의 집이 된다. 그래서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없으면 집이 텅 빈 것 같다. 광고도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집의 변화를 경험한다. 결혼 후에는 ‘남편’이 집이 되고, ‘아내’가 집이 된다. 그래서 남편들이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소개하는가 보다. 남편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의지할 수 있는 품’이 되어 주지 못하면 아내의 집은 없는 것이다. 아내가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더라도 그가 남편에게 ‘편안한 집’이 되어 주시 못하면 남편의 집은 없는 것이다.
시집 간 딸이 친정 집에 오면, 시집살이의 고달픈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시어머니 구박 이야기, 시누이 미운 이야기, 시동생 말썽 피우는 이야기, 미주알고주알 밤새도록 친정 엄마에게 일러바친다. 그러면 엄마가 딸을 위로한다. “시집살이 다 그런 거야, 참고 살아야지!” 딸은 다시는 시집에 안 갈 것 같이 흉을 보고는, 그 다음날 채소 보따리, 음식 보따리 챙겨서 헤헤 하며 시집으로 떠나간다.
참고 견디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 곳이 바로 교회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참고 견디는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 84:4에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친정 집이 되어야 한다. 위로하며 참고 견디도록 용기와 신앙을 북돋아 주어야 한다.
오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세상에 봉사하는 일에 낙심하지 않아 결국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아가는 여러분은 서로 친정 집이 되어 위로하며 참고 견디는데 도가 트이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008년 11월 2일

어디에 힘쓸까?

2008년 11월 2일
어디에 힘쓸까?
전도서 3:9~14, 골로새서 1:9~12, 마태복음 9:18~26

1. 구상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3:11).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전3:9). 방금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지도자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자는 예수에게 상식을 넘어서는 기적을 바란다(마9:18~26). 그러나 예수 앞에 상식은 깨지고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달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자(골1:9). 그래서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신 하나님께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자(골1:12).
2. 설교
요즘 경기가 어렵고, 살기가 힘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살기가 힘들 때, 더 이상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주님, 그러면 이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죠?’
반대로, 내가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아서 이제는 내가 과거에 살던 방식을 청산하고, 새 각오가 생길 때 우리는 질문한다. ‘주님, 제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죠?’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내가 스스로 억지로 열려고 한다. ‘나는 이 길로 너무 가고 싶어!’ 그러나 그 순간에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길을 놓치고 만다.
전도서에는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하는 탄식이 나온다. 전도서 3:10에 보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14절에서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결론 내린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며 두려워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비추어 내가 지금 가는 길이 합당한 길인가? 아니면 내가 이제 행하려는 일이 옳은 일인가? 여러모로 심사 숙고해 보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해야 한다.
한 지도자가 예수에게로 와서 무릎을 꿇고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신다면, 내 딸이 살아날 것입니다.’하고 말한다. 예수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따라 나선다. 그런데 그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댄다. 혈루증은 피가 엉키고 뭉쳐서 곱사가 되는 병이라고 한다. 꼽추가 되면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것이나 같으니 여인의 절실함이 얼마나 컷을 지는 짐작이 간다. 예수는 그 여자가 보인 초조한, 어쩌면 미신적이지만 그러나 모험적인 신뢰, 모든 장애를 극복하는 그 신뢰를 믿음이라고 부르시면서, 혈루증 앓는 여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그의 몸에 영향을 일으킨다.
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과 같은 구절인 마가복음 5:34에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며 구원과 평화를 준다. 하지만 마태는 옷술에 손을 대기만 하는 것으로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은 오해라며, 구원의 이유가 ‘그 여인의 믿음의 힘과 예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마9:22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말하는 ‘바로 그 때’를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마태를 따라 미신적이지만, 무언가 해야만 되겠다는 이 혈루증 앓는 여인의 구원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전도서의 운명을 거스르는 새로운 사건이 생긴다. 바로 혈루증 앓는 여인이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사실 그렇게 따져보면 딸이 죽은 지도자 한 사람은 예수를 찾아와 자신의 죽은 딸에게 손을 얹어 달라는 부탁이다. 예수가 집에 도착했을 때, 장례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피리를 부는 사람과 떠드는 사람들로 시끌벅적 하다. 예수는 죽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자기를 비웃는 무리들을 모두 내보낸 다음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소녀가 벌떡 일어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믿음이니 구원이니 평화니 하는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오는데, 죽은 소녀를 살리는 이 경이로운 일에 대해서는 마태는 아무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구절인 마가복음 5:41에는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도 믿음, 구원, 평화에 관한 말씀은 없으시다. 다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거라 하신 것이다.
예수는 이미 죽은 운명과 아직 죽지 않은 운명에 대해 말씀하시려고 가시는 중에 기필코 주의 은혜를 입어야겠다는 혈루증 여인을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죽지 않은 운명에 대해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고, 자신의 운명을 딛고 절실히 주를 만나 옷술이라도 만져야겠다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구원을 약속하시며, 앞으로 평화롭고 건강하게 살라고 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9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 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언제나 길이 열려 있다. 하나님의 뜻에는 이미 드러난 뜻과 감추어진 뜻이 있다. <계시>는 명백하게 이미 알 수 있도록 이미 드러난 뜻인데,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계명이 곧 계시다.
그러나 <섭리>는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열심히 협력하여 아버지의 선한 섭리적 뜻이 내 인생을 통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의 일방적 결정이나 제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밝혀 주시려는 자비의식이며(히 12:5-6) 허물과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달려가는 성도들의 발길을 제어하시려고 밟아 주시는 긍휼의 ‘브레이크’이다. 어거스틴도 그의 ‘참회록’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시어 적당히 우리에게 유익한 시련과 고통을 주시어 다시 주님에게 돌아오도록 부르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넘어졌는가, 왜? 브레이크가 걸렸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기 보다는, 이미 나타나 있는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항상 제시되어 있고, 그 길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의 진실이 자기 앞에 추악하게 나타났을 때, 비로소 객관성 있게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참회하게 된다. 베드로가 자기자신에 대해 너무 처참한 모습을 본 나머지 울었다고 한 부분이 있다. ‘아, 이게 나였구나!’ 겉으로 보여진 자신의 입술은 죽는데 까지 따라 가겠다고 호언장담 했는데, 남들 눈에 감춰진 자기의 본래 입술은 그리스도를 모른다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를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가 발견한 길은 자신을 사랑하셔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자신의 올바른 길이었다.
이런 올바른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지식이 필요하다. 어떠한 지식인가? 우리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학교를 다녔으며, 매일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신문을 보거나 방송을 듣는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명쾌하게 주는 것은 없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 기도한다고 한다.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도록 해야겠다. 오늘 우리 일생의 길에서 주님 내려주시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한다.

너를 버릴 수 없다

2008년 10월 26일(한우리교회)
너를 버릴 수 없다
에스겔 34:25~27, 사도행전 20:28~31

1. 예화
바보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뻔 했는데, 구조대가 와서 줄을 붙잡고 올라오고 있다가, 생각한다. ‘내가 손을 놓으면 저 구조대원은 뒤로 자빠지겠지?’

일본 도쿄 올림픽은 1964년에 있었다. 성화 봉송 주자인 사카이 요시노리는 원자탄이 떨어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인기 종목이었던 유도와 배구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일본은 유도에서 4개 중 3개를 배구에서는 여자 경기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도종환 글.
일본 도쿄 올림픽 때,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 된 건물을 헐게 되었다. 인부들이 지붕을 벗기려는데 꼬리 쪽에 못이 박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도마뱀 한 마리가 도망하려고 몸부림치는 게 보였다. 도마뱀이 못 박힌 채로 3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살아왔다는 게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인부들은 원인을 알기 위해 철거공사를 중단하고 사흘 동안 도마뱀을 지켜보았다. 그랬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이었다.
못 박힌 도마뱀은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몸부림칠 때마다 살을 찔러 오는 고통은 또 얼마나 컸을까?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다른 도마뱀은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도마뱀은 원래 사람의 손에 꼬리가 잡히면 그 꼬리를 잘라내고 도망치는 파충류인데, 아마 꼬리를 잘라버릴 수 있는 상황도 못되었던 모양이다. 죽으려고 해야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훌륭한 것은 바로 곁에 있던 도마뱀이다. 사랑하는 도마뱀이 받는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 도마뱀이 살고자 몸부림칠 때마다 어딘가로 가서 먹이를 물어왔다. 그리고 입으로 건네주면서 어떤 희망의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말은 할 수 없지만 절망하지 말라고, 살아야 한다고, 어떤 눈짓, 어떤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2. 설교
오늘 에스겔서에서 만난 하나님은 다리에 대못이 박힌 채 못 된 지도자들로부터 강압과 수탈을 당하고 있을 때,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들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싸매시고, 감싸시고, 먹이시고, 고치시며, 회복되기만을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겔 34:27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은 그 소산을 내어 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평안히 살 것이다. 그들이 멘 멍에의 나무를 내가 부러뜨리고, 그들을 노예로 삼은 사람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하여 주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그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을 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보는 현실은 조금 다르다. 그렇게 인간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와 평화라는 것은 왜 구호 속에서만 있는가?
네 글자 한자말 ‘기고만장(氣高萬丈)’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뜻은 “펄펄 뛸 만큼 대단히 성이 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뜻으로는 거의 쓰일 일이 없다. 대단히 성이 나면 “대단히 성이 났다”고 하거나 “크게 성이 났다”고 할 뿐이다.
'뭘 믿기에 저렇게 기고만장이야?', '뭘 믿기에 저렇게 거들먹거려?', '뭘 믿기에 저렇게 잘난 척이야?'라고 쓴다. 기고만장의 둘째 뜻은 “우쭐하여 뽐내는 모습이 대단하다”라고 한다. 우리가 익히 듣는 ‘기고만장’은 이 둘째 뜻이다.
우리가 아는 한 성경에 나와 있는 기고만장의 경우는 여러 곳에서 보인다. 먼저 뱀이 하와를 꼬셔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하와로 하여금 기고만장하도록 하였고, 선악과를 함께 먹은 아담도 나는 잘못이 없고, 단지 당신이 주신 여자가 먹으라해서 먹었을 뿐이라며 억지를 부린다. 또 흔히 알고 있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대화를 나눠볼 수 있다는 바벨탑도 인간의 기고만장한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처음 밧줄에 매달려 구조되는 한 바보의 이야기 속에서 이 바보는 기고만장한 녀석이다. 그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바보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기고만장한 것이다.
성서를 통해 본 역사는 인간의 기고만장한 뻔뻔함이 늘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고,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 어쩌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행위의 결과로 받는 당연한 것이다. 고무줄을 머리에 묶고 당겼다 놓으면, 고무줄은 우리의 얼굴을 치며, 고통스러워한다. 고무줄을 당겼다 놓는 것은 우리가 행한 일이다. 그 일로 벌을 받아 얼굴이 아픈 것이 아니고, 우리의 행위로 인해 자연히 아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고만장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요즘 유행하는 말이 웰빙이라고 한다. 경기도 어디쯤 ‘웰빙교회’라는 교회 간판을 보았다. 웰빙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라는데, 교회가 잘 먹고 잘살기만을 바라며 다니는 것이라면, 그게 무슨 교회로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내가 잘 먹고 잘살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인가? 우유의 단백질 함양을 높이기 위해 멜라민을 투여한 사람도 사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가족의 웰빙, 잘 먹고 잘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다. 자신도 죽으려고 멜라민을 투여했겠는가? 결국 잘 먹고 잘살기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낭떠러지에 선 바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잘 먹고 잘사는 일에 늘 관심을 가지지만 사실은 우리가 잘 먹고 잘살고 있는지는 우리 자신도 모르고 있다. 멜라민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우리는 귀여운 우리 아이들에게 늘 먹여왔던 식품들이었다. 광우병이라는 병을 알기 전에는 우리에게 쇠고기는 무척 귀한 음식이었다. 광우병의 원인이 되는 동물성 사료는 미국산 쇠고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농가에서도 늘 먹여왔던 사료인데 말이다.
꼬리에 못이 박힌 도마뱀은 고통과 절망 때문에 처음엔 먹을 것조차 거부하며 팽개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또 어딘가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해다 입에 넣어주는 동료 도마뱀의 표정을 보았을 것이다. ‘너를 버릴 수 없다는 그 표정, 나만 살기 위해 네 곁을 떠날 수 없다는 그 몸짓’, 결국 못이 박힌 도마뱀은 그걸 믿으면서 모든 고통과 절망을 견뎌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위험을 무릅쓰고 먹을 것을 구해다 주면서 3년을 함께 살아온 도마뱀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어두운 지붕 밑에서 두 도마뱀은 함께 사랑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서로 끌어안은 채 잠들곤 하였을 것이다. 그 3년이 얼마나 길었을까? 그 긴 고통과 함께 살았으니 이제 그들이 가지는 깊은 신뢰와 사랑은 또 얼마나 깊을까? 어쩌면 둘 사이에는 ‘너와 나’가 아닌, 내가 너의 것이고, 너는 나의 것이라는 깊고 깊은 확신이 있을 것이다. 그 확신은 자신의 꼬리에 박혀 3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쇠못보다 더 단단한 것이었을 것이다.
행 20:28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주님께서'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잘 먹고 잘살 수 있고,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라며 기고만장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눈물로 훈계하는데, 그것은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와있는 성령이 감독을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실 교회를 돌보게 하셨다.
이 말은 바울이 이제 투옥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면서 마지막 부탁하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실컷 울게 된다.
행 20:36 바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행 20:37 그리고 모두 실컷 울고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행 20:38 그들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은, 다시는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의 말이었다. 그들은 배타는 곳까지 바울을 배웅하였다.
이제 우리의 기고만장함을 그만 두고, 겸손함으로 무장하여, 주님 주신 교회를 통해 ‘내가 너를 버릴 수 없다’는 그 절실함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실 교회를 돌보는 일에 앞장서는 여러분이 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