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0일

서울교회 배안용 목사 설교

2009년 8월 30일 주일설교

숨어서 보시는 주

2009년 8월 29일

안델센의 동화 “어머니의 사랑”

안델센의 동화 “어머니의 사랑”




몹시 쌀쌀한 겨울 저녁식사를 끝내고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재우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문을 열고 보니 허름하게 옷을 입은 노인이 구걸을 합니다.

불쌍한 마음이 든 어머니는 그 노인에게 들어와서 앉으라고 하고 저녁을 준비해 주기 위해서 잠깐 아기를 안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나와 보니 그 노인이 아기를 납치하고 사라져버렸습니다. 다급한 어머니는 준비 없이 추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밤새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잘못하여 물에 빠졌습니다. 어머니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 물의 요정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아기를 꼭 찾고 싶으면 당신의 <눈>을 나에게 주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물에서 건져내어 주겠소.”

어머니는 살아서 아기를 찾고 싶어서 눈을 요정에게 주었습니다.

맹인이 된 어머니는 더듬거리며 아기를 찾아다니다가 골짜기에 떨어졌습니다. 거기는 가시나무 위였습니다. 가시나무는 어머니를 받은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꼭 살아서 애기를 만나고 싶으면 이 추운 겨울 동안 나를 꼭 껴안아주시오. 그래서 어머니의 따스한 가슴으로 우리가 얼어 죽지 않게 해 주시오. 그러면 봄이 될 때에 당신을 여기서 나가게 도와주겠소.”

어머니는 아들을 찾고 싶은 열망에 한 겨울 동안 가시나무를 안고 지냈습니다. 가시나무를 안고 차가운 겨울을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우리들을 기르시기 위하여 애쓰시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봄이 되었을 때에 가시나무는 어머니를 튕겨내었습니다. 맹인이 되고 <온 몸>에 가시나무의 상처를 안은 어머니는 아들을 애타게 부르면서 애기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공동묘지로 들어섰습니다. 어머니는 거기에서 허리는 꼬부라지고 얼굴은 주름살투성이인 무덤의 요정을 만났습니다. 무덤의 요정은 이렇게 제의합니다.

“당신의 젊음을 나의 늙음과 바꾸어 주면 당신의 아들과 만나게 해주겠소.” 어머니는 자기가 저렇게 꼬부라지고 주름살투성이가 될지라도 아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젊음>을 주고 아들을 찾았습니다.

눈은 맹인이 되고, 온 몸은 가시나무 상처로 가득하고 얼굴은 폭삭 늙어버린 어머니는 드디어 아들을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만난 기쁨에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자기 품에 아들이 있을 때에 어머니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과 같고 가슴은 행복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이 늙으면 <눈>은.. 시력을 잃고 <몸>은.. 자식 키우느라 고생해서 상처투성이, 병투성이가 되고 <얼굴>은.. 노파의 얼굴이 되었지만 자식을 키운 기쁨과 감격은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합니다. “오직 너만 행복하여라.” 이것이 우리들의 부모님의 소원이요 기도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자식이 철이 없어서, 그 노쇠한 눈, 몸, 얼굴을 보고 오히려 부모를 회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를 키우시느라 그렇게 희생한 것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소유한 허만 노인

19세기 이탈리아 시골, 나버드 마을에서, 허만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족도 없이 한평생 혼자 아주 가난하게 살다가 86세로 하직했다.
몇몇 이웃과 친척들이 장례식을 치르고, 친척 중 한 명이, 혹시 남은 물건 중에 쓸만한 게 있는지, 그의 가재도구들을 살펴보았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모든 물건들이 넝마라고 할 만큼, 낡은 것들 일색이었다. 그래도 그 가운데 ‘혹시 돈 될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니,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바이올린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 친척은 그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어내고, 여기 저기 살펴보던 중에 너무 놀라서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바이올린은, 세계적 바이올린 제작의 대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들었다고, 친히 서명한 진품 '스트라디바리우스'(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바이올린) 였다.
그 바이올린은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으로서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명품이다. 지금 아마 수 십 억을 호가할 것이다. 그런 악기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허만 노인은, 그 악기가 낡고 가치 없는 싸구려인줄 알았다. 그래서 자기 집에 그 보물을 두고도, 그는 한 평생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다.
무슨 뜻인가?
자기가 가진 것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 가치를 모르면 아무 소용없다.

2009년 8월 28일

배씨 이야기

배씨의 시조는 지타(紙陀)로 나타난다.경주출생인 지타는 촌장들을 모아 박혁거세를 신라초대왕으로 만들었다. 이에 지타는 총재태사에 오른후 배씨의 성을 받게된다. 하지만 이후 세경주배씨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왕건과 함께 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건국한 현경이 중시조로 경주배씨의 후손들이 이어지고 있다. 고려개국 일등공신인 현경은 정일품벼슬인 문하시중에 오르면서 경주배씨는 중흥기를 누렸다.


이후 현경의 6대손 삼형제가 각각 분성파(원룡), 성산파(천용), 달성파(용운)로 나뉘어 분성배씨, 성산배씨, 달성배씨로 불리고 있으나 한핏줄이 분명해 경주배씨로 통합해 불리우고 있다.


이후 흥해파와 권산파도 분류해 다섯파로 보기도 한다.삼형제의 맏형인 원룡은 분성파의 파조가 된다.원룡은 고려조에 정3품벼슬인 병부상서에 올라 분성군으로 임명됐다. 분성은 현재 김해의 옛지명으로 김해배씨로 불리우기도 한다.

원료의 6대손인 극수(克壽)는 태종때 광주부윤(현재 시장), 제주목사를 지낸후 고향을 떠나 강진군 군등면 평덕마을에 생활을 시작한다.극수는 경주배씨에서 가장먼저 강진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나타난다.

극수의 후손들은 호례의 5명의 아들을 기준으로 각각 나뉘게 된다.세원의 후손들은 성전면 수양리에 20여가구가 생활하고 있고 세형의 후손들은 강진읍 동성리 일대에 10여가구가 살고있다. 또한 세정의 후손들이 완도군 고금면 가교리에 20여가구, 세언의 후손들은 해남읍 북평리에 10여가구가 터를 잡고있다.군동면 평덕마을에는 문중정각인 송헌재(松軒齎)가 놓여있다. 강진에서 처음생활을 시작한 극수의 호를 따서 만든 송헌재에는 매년 양력 5월5일 후손들이 모여서 제사를지내고 있다.원래 매년 음력 10월15일 제사를 지냈으나 외지의 후손들의 적극적인 행사참여를 위해 제삿날을 변경 한 것이다.평덕마을에는 경주 배씨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입구에 위치한 두개의 바위인 군노암. 당시 유명한 풍수인 이신이 이곳을 지나다 바위를 제거하면 후손들이 더욱 번창할것이라고 말했다.이에 후손들은 한쪽 바위를 없애고 나자 그속에서는 파랭새 두 마리가 나와서 도암면 남창방향과 강진읍 목리방향으로 라라갔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에게 좋지않은일들이 생겨나자 후손 응철이 바위를 다시 복원해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성산파는 둘째인 천룡을 파조로 한다. 성산파는 다른 성씨들에 비해 가장 많은 후손들이 번성했다. 시조인 지타는 신라개국을 도왔고 중시조 현경은 고려, 후손 극겸은 조선개국에 공신으로 자리했다. 극겸은 고려말 정국이 혼란하고 민심이 흐트러지자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했고 종일품인 벼슬인 숭록대부까지 올랐다.이후 후소닌 일학이 정5품 사조정락을 지낸후 완도 고금에서 생활을 시작했고 일학의 증손자인 진채가 칠량면 영동마을로 이주해 강진생활을 시작하게된다.진채의 아들 경용은 성균진사를 지냈고 세명의 아들을 두었다. 응규, 환규, 성규 삼형제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했다. 삼현제는 헌종때(1840년) 부모가 한겨울에 열병을 앓자 각자 다리에 상처를 내 부모에게 피를 입에 넣어 위기를 넘겼다. 여기에 성산파에는 열녀도 빼놓을수없다. 성규의 처 창녕성씨는 삼년간 남편 병수발을 믿았고 남편이 죽은후 기일에 맞춰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고종(1874년)이 성산파에 삼강문을 내렸다.삼강문은 충, 효, 예가 모두 갖춰진 집안에 하사하는 것으로 현재 완도군 고금면 농상리에 소재하고 있다.


셋째아들 용운을 파조로 하는 달성파. 용운은 정이품벼슬인 평장사를 지낸후 달성군에 임명됐다. 이에 후손들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가문을 지키고 나라가 어려울때 애국활동에 많은 활동을 보인다. 나주,영암등에 후손들이 기거하다 성종이 강진읍 월남마을에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후손들이 이어지고 있다.


배씨의 역사(歷史)


배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성씨의 하나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성씨의 연원은 신라시대 왕족인 박석김(朴昔金)의 3성(三姓)을 비롯하여 귀족층인 6성(六姓) 배(裵), 이(李), 최(崔), 정(鄭), 손(孫), 설(薛)이 시원(始源)이다. 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3조원훈을 가진 성은 우리 배씨가 유일한 것이다. 삼조원훈은 신라 건국에 원훈이신 문양공(文讓公) 휘(諱) 지타( ), 고려 개국 원훈이신 무열공(武烈公) 현경(玄慶), 정절공(貞節公) 휘(諱) 극렴(克廉)으로, 극렴공께서는 이성계를 도와 시들어 가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민생을 도탄에서 구하니 개국1등에 서훈(敍勳)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작되었으며 첫 영의정이 되니 세 분은 세 왕조 건국에 원훈으로 모두 수상으로서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우리 성씨는 모두 무열공을 중시조로 하는 경주배씨의 갈래로서 같은 세계(世系)를 가졌다.


우리 성씨는 고려에 자주호국을 위해 항몽하신 민족적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삼별초(三別抄)의 지휘관 배중손(裵仲孫) 장군, 합단(哈丹)의 침입을 격퇴한 배정지(裵廷芝), 왜구와 싸워 혁혁한 전과를 낸 배구(裵矩), 배언(裵彦), 배극렴(裵克廉)의 활약 또한 빛난다. 또한 주장으로서 여진족 방어와 건주위(建州衛) 정벌(1467년)에 공을 세운 곤산군 배맹달(裵孟達), 임진왜란 때 항왜 호국하신 훙양 현감으로 이순신 장군을 보좌한 배흥립(裵興立), 경상도 유격장 배경남(裵景男), 의병장 배대유 등이 계신다.

우리 성씨는 절의(節義)와 학문에 있어서도 훌륭한 빛을 남겼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대해 분통함에 못 이겨 두문동에 들어가 세상을 등진 배문우(裵文祐), 배상지(裵尙志),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 배을서(裵乙瑞)가 있다. 학문에도 우리 배씨는 태종때 배환, 배남, 배강의 삼형제가 문과에 오른 것을 비롯하여 45명의 합격자를 내었다. 그중 퇴계 제자인 임연재 배삼익, 모정 배대유, 남명 제자인 낙천 배신과 등암 배상룡, 금역당 배용길, 사계 제자인 농아 배승조, 안촌 배응경, 화당 배상유, 괴담 배상열 등을 배출함으로써 문무에 빛나니 한국에서도 유수한 성씨의 하나이다.

2009년 8월 24일

2009년 8월 23일

생명의 빵

요한복음 6:28~35

1995년 10월 17일, 매사추세츠 메모리얼 병원에서 카이리Kyrie와 브리엘Brielle Jackson이라는 쌍둥이가 태어났다. 두 아이는 예정일보다 12주간(약 3달)이나 빨리 태어났다. 태어날 때, 1킬로그램 밖에 안 되는 조산아들이었다. 이들에게 일어난 실화는 불가사의하다. 쌍둥이 중 한 아이(브리엘)가 심장에 큰 결함을 안고 태어났는데,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 아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 이 아이들은 각각 인큐베이터 안에 보내져서 양육받았다. 그런데 카이리는 잘 회복이 되어 잘 자라고 있었는데, 브리엘은 그렇지 못했다. 브리엘은 아무리 애를 써도 점점 더 나빠져서 죽기 직전 상태까지 갔다고 한다. 의사들은 다르게 손 써볼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을 안타깝게 돌보던 19년 경력의 간호사 Gayle Kasparian는 그 죽어가는 신생아가 ‘뭔가 자기에게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그녀는 유럽에서 과거에 실시해오던 미숙아 치료법이 생각났다. 그래서 아픈 아기를 건강한 쌍둥이 아기의 인큐베이터 안에 집어넣을 것을 제안했다.
이 아기들은 원래 엄마 배 속에서 함께 부둥켜 안고 있었는데, 아기들을 따로 떼 둘 것이 아니라, 둘을 같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이는 병원의 방침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담당 의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엄마의 동의를 얻어, 결국 엄마 자궁에서처럼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나란히 눕혀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쌍둥이는 사진처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눕게 되었다. 그런데 건강한 아기(카이리)가, 제 스스로 팔을 뻗어 아픈 아기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이때부터 기적이 일어났다. 이 아기의 손길이 닿아있을 때부터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픈 아기(브리엘)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에는 체온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픈 아기의 심장, 혈압, 체온이 모두 정상 아기의 심장, 혈압, 체온을 똑같이 따라잡았다. 간호사는 처음에, 기계가 오작동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만큼 기적이었다는 증거다. 의사들은 이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사진에 ‘생명을 구하는 포옹 The Rescuing Hug’ 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지역 신문에도 보도되어졌다.
그 후부터 쌍둥이 신생아들은, 인큐베이터에 같이 눕히는 방식이 다른 병원에서도, 조심스레 채택되어져 가고 있다고 한다. 그 후 두 아기는 완전히 정상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한다. 기자들이 추적한 이 두 아기는, 5년 후 2000년도에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인 Heidi & Paul Jackson 부부가 공개를 꺼리고 집 전화번호를 변경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서, 더 이상 사진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먹는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먹을 것이 해결되면 사람들은 조금씩 이상해진다. 먹을 것이 없을 때 자살을 많이 할 것 같지만, 사실은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 후에 사람들은 더 많은 자살을 하는 것처럼 어쩌면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이 우리를 더욱 더 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님도 역시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고백하며, 성령을 체험하는 성만찬도 역시 먹고 마시는 일을 기억하도록 하고 있다.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시고 그 빵을 떼어서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라고 선언하셨다. 또 잔을 드시고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라’고 하신다. 먹고 마시는 이 행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본문 전에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요 6:23 그런데 디베랴에서 온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무리에게 빵을 먹이신 곳에 가까이 닿았다.
요 6:25 그들은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를 만나서 말하였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요 6:2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요 6: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통해 더욱 영원한 것을 찾으라고 하신다. 그것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먹고 마시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찾으라는 말씀이시다. 사람들의 관심은 먹고 사는 문제에 있지만, 그것이 생명을 위한 것인지, 내 입에 단 것으로 만족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바로 그것이 사람들의 한계이다. 내가 먹는 것이 내 생명을 살리는 것인지, 내 생명을 죽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배가 불렀기 때문이 아니냐? 하시면서, 영원이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를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빵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외친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선언하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복음이다.

2009년 8월 16일

서울교회 배안용 목사설교 - 죽어야 마땅

죽어야 마땅

2009년 8월 16일 서울교회 설교

배안용 목사

2009년 8월 13일

창공을 나는 아름다움, 전통 연(鳶)


http://ssairen.tistory.com/43?srchid=BR1http%3A%2F%2Fssairen.tistory.com%2F43


창공을 나는 아름다움, 전통 연(鳶)

한국 연의 역사를 문헌에서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 전 신라 진덕여왕 원년인 647년에 비담(琵曇)과 염종(廉宗)의 반란 시 김유신 장군이 연을 사용했다는 기록이『三國史記列傳』이 최초로 문헌에 나타나는 연의 역사다. 이후 고려 말엽(西紀 1374年) 최영 장군이 탐라국 평정 시 군사를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에 띄워 절벽 위에 상륙시켰으며, 불덩이를 매단 연을 적의 성안으로 날려 보내 불타게 하여 공략하였다는 기록이 『東國歲時記』에 적혀있다.

조선조에는 세종대왕(西紀 1455年) 때 남이 장군이 강화도에서 연을 즐겨 날렸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수단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했다는 사람들의 구전 기록 등이 전해진다. 특히 영조대왕은 연날리기를 좋아하여 즐겨 구경하고 장려하여 1725년~1726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 연날리기가 널리 민중에 보급되어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1954년 민족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연날리기를 장려하여 당시 공보부에서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연 제작 기능보유자들을 수소문하여 연날리기 대회를 광복 후 처음으로 열게 되었으며, 그 후 1956년 한국일보사 주최로 제1회 전국연날리기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이승만 전 대통령도 매년 대회장에 나와 관전도 하고, 연도 날리며 연에 대한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때부터 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어 연을 수집, 제작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오랜 옛날부터 전승되어 오는 민족 전래의 연날리기는 연줄을 한없이 풀어내는 이유도 주위에 장애물이 없는 청계천변(서울), 개울가, 동산(시골)에서 많이 날렸는데 그 시기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대보름까지가 본격적이며 특히 대보름 며칠 전에는 구경꾼들의 성원과 열기가 절정에 달해 장관을 이루었다.

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 며칠 전에 큰 성황을 이루지만 대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는 것이 본래의 풍속이다. 대보름이 되면 ‘액연 띄운다' 하여 연에다 ’액(厄)‘자를 쓰기도 하고 ’送厄‘이나 ’送厄迎福‘이라고 써서 얼레에 감겨있던 실을 모두 풀어 멀리 날려 보낸다. 이것을 '액연 띄운다', 혹은 '액연 날린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연은 기록에 의하면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연날리기를 놀이로 삼게 되었고, 그것이 민속과 결합되어 조선 시대에 들어와 연을 날리는 시기가 섣달부터 정월 보름 사이로 고정되었다. 이는 한국의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경기에 연날리기를 하면 농사에 지장을 줄 것으로 보고, 농한기인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즉, 정월 보름날 액막이의 민속과 관련시켜 연을 날려 보냄으로써 연날리기를 끝내고, 다시 농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강변 등 넓은 공간과 알맞은 바람(초속 3~5m)만 있으면 연중 어느 때라도 연을 날리는 새로운 풍속도가 그려지고 있다.

민속연 기능보유자 노유상 옹은 1993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호 한국민속연의 보유자로 지정되어 한국정통연의 맥을 잇고 있다. 올해 104세인 노유상 옹이 본격적으로 연에 관심을 갖고 제대로 연을 만들어 날리게 된 것은 15살 무렵 박근석(朴根錫) 씨를 만나면서부터인데, 그때 연 만드는 기술뿐만 아니라 날리는 기술, 얼레(연자세) 만드는 기술, 연줄에 사기를 먹이는 기술, 상대편의 연줄을 끊는 연싸움 기술 등 연에 대한 대부분의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90년이 넘게 연을 만들고 날려 온 노유상 옹이 지금까지 만든 연은 100여 종에 다다른다. 노유상옹의 연 제작 기능은 아들 노성규씨에게 전수가 되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 현재는 3대를 잇는 노순씨가 민속연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2009년 8월 11일

난지물놀이장 물놀이와 분수쇼



난지물놀이장 물놀이와 분수쑈

2009년 8월 10일 현준이네
2009년 8월 10일 난지물놀이장에서 오후 놀고, 저녁 먹고, 8시에 물놀이장이 끝나고 어둠이 내렸는데 갑자기 분수쇼를 시작하더군요... 가다가 다시 돌아와 분수쇼 구경...

2009년 8월 9일

살아 있는 빵



서울교회 배안용 목사 2009년8월9일 설교
살아 있는 빵

우리시대의 역설

제프 딕슨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하며
거짓말은 너무 자주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리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은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을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 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 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그리고 더 느끼기 어려워진 행복.

'군불을 때면서'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면서
쓰다가 버린 파지를 불쏘시개로 쓴다
쓰다가 고치고 쓰다가 고치다가
원본에서 멀어져버린
시 한 편을 위해
사생아처럼 버려진 종이들
누추하고 불구인 것들
그렇다고 완벽하지도 못한
시 한 편의 알리바이를 위해
소신해야 하는 내 시의 과거들
제 몸에 불 붙여
포개놓은 장작에 불길을 옮겨 일궈주는 밑불,
그래서 시 몇 편보다
저 수많은 파지가 더 시답다
진입해 보지도 못한 중심에서 밀려나
지금은 구겨진 파지처럼 주저앉아
하릴없이 군불이나 때지만
나 여기 있어 모두에게 얼마나 다행인가
파지들이 일구어내는 불빛에서 온기에서
내 생의 원본을 읽는다
(복효근·시인)

2009년 8월 8일

‘일가견’있는 사람보다는 ‘한가락’하는 사람이 보고 싶다.

호랑이가 풍뎅이 한 마리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조물주는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다고 저런 미물 따위를 만드셨을까. 그 말을 들은 풍뎅이가 호랑이에게 빈정거렸다. 제정신이냐. 발도 두 개나 모자라고 날개조차도 없는 장애자 주제에. -이외수님의 트윗터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캐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아마도 우리네 교육이 남을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나만의 노하우 즉 일가견을 지녀야 잘 살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어떤 분야에 이른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보통 마니아나 전문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매진하는 마니아와 한 분야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전문가도 좋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들쑤시고 다니는 특기는 좀 아니다 싶다.
그런데 일가견이란 이 말은 일본에서 왔단다. 본래 일본말이 최근에 우리 사전에 오른 거란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쓰니까 우리말 사전에도 오른 것 같은데, 이 말은 일본말로 “독특한 주장이나 학설”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조금 더 그 의미를 명확히 해보면, ‘어느 한 방면, 어떤 문제에 대해 갖춘 일정한 체계의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자기만의 독특한 주장이나 학설 또는 그 견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一家見’이라 쓰고 ‘いちけんしき[이찌갱시끼]’라고 읽는다고 한다.
때문에 ‘일가견’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보다는 자기 자신의 주장에 더 의미를 두는 말이 되겠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화두 중 ‘소통’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호랑이 입장에서 보면 풍뎅이가 잘못된 것이고, 풍뎅이 입장에서 보면 호랑이가 날개도 없는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일가견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다. 때문에 나와 다른 것은 무언가 모자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다르다.’란 표현보다는 ‘나와 틀리다.’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더 많이 쓰고 있지 않는가. ‘오른손’이라는 말 보다는 ‘바른손’이란 말을 써서 ‘왼손잡이’에게 손가락 짓을 하고 있지 않는가. 여자가 출세하면 그냥 ‘변호사’가 아니라 ‘여류변호사’, ‘여류작가’로 구분을 짓지 않는가.
그런데 이와 비슷한 우리말에 ‘한가락’이 있다. 한가락이란 뜻은 ‘1)노래나 소리의 한 곡조. 2) 어떤 방면에서 썩 훌륭한 재주나 솜씨’라고 한다. 음악이란 여러 가지 각기 다른 소리가 하나 되어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연극에서는 한 배우가 대사를 할 때는 다른 배우는 조용히 있어야 하지만, 오페라에서는 모두가 대사를 해도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나만의 한가락을 하는 것이다. 물론 나만의 한가락이 ‘일가견’이 되어 자기만의, 자기를 위한 독특한 가락이 돼버리면 오페라든 합창이든 그 음악을 망치게 될 것이지만, 나의 한가락을 잘 해낼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가정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한가락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임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한가락을 맡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선율의 한가락을 책임진 사람들이다. 오늘 음악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보다는 내가 맡은 분야에 한가락을 담당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그립다.

2009년 8월 7일

맹인모상(盲人摸象)

배안용 목사의 문화놀이터

[맹인모상(盲人摸象)]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크거나 만질 수 없는 물건을 어떻게 인식할까? 아마도 그들만의 상상력으로 만든 어떤 것을 막연하게 추측할 것이다. 때문에 앞을 볼 수 있는 사람과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인식하는 대상은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코끼리라는 동물은 기둥같이 생겼다", "아니다, 코끼리는 부채같이 생겼다" 코끼리의 다리, 귀 등을 각각 만진 맹인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만 가지고 고집하고 다툰다는 뜻이 바로 '맹인모상(盲人摸象)'이다. 그런데 이런 시각장애인을 위해서 점자판 동물도감이 발간된다고 한다.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관장 송경태)은 국내 최초로 100쪽 분량의 2권짜리 점자판 동물도감을 제작 중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제작되는 점자 동물도감에는 각 쪽마다 동물 100여 종의 전체적인 형태는 물론, 눈과 꼬리 등 세세한 모양까지 점자로 표현된다고 한다. 또한 맞은편 쪽에는 해당 동물의 크기, 주 먹이, 서식 장소, 생활 방식, 수명 등 동물에 대한 각종 설명이 역시 점자로 담기게 된다.
맹인이 아니어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참 좋다. 무엇이든지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원하는 만큼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큰 축복이다. 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불편할뿐더러 또한 매우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볼 수 없는 사람”을 이야기 할 때 “앞을”이라고 굳이 붙여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뒤는” 볼 수 있단 말인가?
주식이 떨어진다고 하기도 하고, 주식이 오른다고 하기도 한다. 쉽게 우리가 주식 한다고 하는 말은 주식의 값이 떨어진 후 사서, 값이 오른 후에 팔아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니 주식을 해서 이익을 남기려면, 지금 값이 떨어진 주식 중 우량주식(앞으로 전망이 밝아 값이 다시 오를 수 있는 주식)을 사서 후에 값이 오르면 팔면 되는 것이다.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는가? 코끼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코끼리의 모양을 설명하고, 또 코끼리를 봤던 사람은 그 설명을 듣고 금방 코끼리라는 답을 맞출 수 있다. 그렇듯 쉬운 것이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보이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값이 떨어진 우량주식을 사서 값이 올랐을 때 팔면 많은 이득을 볼텐데,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주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왜 사람들은 대부분 주식의 값이 비쌀 때 사서, 값쌀 때 팔아 막대한 손해를 보고 망하는 것일까?
우리도 ‘뒤는’(과거) 볼 수 있지만, ‘앞은’(미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물리적으로 맹인이 아니라 해서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은 못된다. 어차피 앞을 못 보는 것은 피차일반이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나 나서 크게 다치는 사람들은 미리 앞을 볼 수 있었다면 사고가 날 그 차를 타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있다. 누가 제일 재수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버스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다음의 사람 중 누가 가장 재수 없는 사람일까?
1) 지난 정거장에 내려야 하는데 졸다가 한 정거장 더 타고 가다 사고 난 사람.
2) 출발한 버스를 열심히 뛰어서 떠나려는 버스를 기어코 탄 사람.
3) 내려할 정거장은 지났지만 맘에 쏙 드는 이성을 보고 스스로 정거장을 지나친 사람.
4) 마음이 울적해서 버스 타고 정처 없이 가고 있던 사람.
운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운이 좋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1)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하지만 졸다가 깜짝 놀라 사고 전 정거장에 잘못 내린 사람.
2) 버스 타려고 했는데 물건을 떨어뜨려 못 탄 사람.
3) 버스에 꼭 타야 하지만 맘에 쏙 드는 이성이 무슨 버스를 타나 보려고 안 탄 사람.
4) 버스가 왔지만 멍하니 딴 생각 하다 버스 놓친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점자를 통해 손으로 세상을 만날 수 있고, 흰지팡이를 통해 '앞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눈 멀정해도 앞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미래를 손끝으로 알려주는 무엇인가가 있으면 좋겠다.
킴 웍스는 한국전쟁 때 맹인이 된 한국 고아이다. 그는 어느 미군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성악가가 되었다. 성악가 킴 웍스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사람들은 맹인인 저를 인도할 때 100미터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바로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거나, 계단이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저를 인도하는 분의 말을 믿고 제가 한 걸음씩 발을 옮기면 제가 가려는 목적지에 꼭 도착합니다. 우리는 20년 후,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아니 1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단지 내 앞에 닥친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 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변에 동료와 친구와 가족이 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앞을 봐 주면서 조금씩 조금씩 내 앞을 열어가는 것이다. 1분 앞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10년 후, 20년 후를 보지 못한다고 한탄만 하고 있기에는 나를 넘어뜨리는 장애물이 너무 많지 않은가? 빨리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가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上善若水
最高の善は 水とようだ.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배안용 050-2580-3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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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색상표

언제 여기에 오셨나요?



서울교회 배안용 목사 2009년8월2일 설교
언제 여기에 오셨나요?

언론악법 원천무효 목정평 금식기도와 청와대 항의전달



지난 24일부터 언론악법 원천무효를 위해 금식기도를 해 온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의 투쟁과 기도의 기록이다.

언론 악법 원천 무효 선언 촛불기도회 영상



지난 7월 22일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 의해 자행된 언론악법 처리와 관련해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이하 목정평)는 이번 법안 통과가 원천무효임을 선언하며, 악법이 즉각 폐기되기를 촉구하는 촛불기도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하고자 합니다.
현재 목정평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실에서 언론악법이 즉각 폐지되기를 요구하며 철야 단식 기도회를 갖고 있으며, 뜻을 함께하는 이들의 참여를 넓히기 위한 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금번에 이뤄진 언론악법 통과는 국민이 원하지 않는 소위 언론 재벌의 이익만을 대변해 이뤄진 국민에 대한 무시이며, 집권여당의 폭거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들이 그토록 주장했던 법치마저 무시된 절차상의 명백한 불법이라는 점에서 폐기되어 마땅한 법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 기독인들은 법안이 즉각적으로 폐기되길 바라며 함께 기도하고자 합니다.

일시: 2009년 7월 26일(일요일) 오후 7시 30분
장소: 연지동 기독교회관 앞 1층
주최: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설교: 이해학 목사(주민교회)

배불리 먹은 뒤



2009년 7월 26일
서울교회 배안용 목사 설교


언론악법 원천무효 목회자 금식기도회
2009년 7월 24일부터
NCCK 총무실에서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2009년7월19일 배안용 목사 설교

외딴 곳에 가서 쉬자

구원으로 인도하는

2009년 7월 19일

서울교회 성가대 찬양

곽종준 장로 가족 밴드 찬양

효자어린이집 2009년6월27일 공개수업

총회 교회와 사회위원회는 7월 13일(월) 오후 7시, 국회의사당 정문(국민은행 앞)에서 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 주관으로 '언론악법 저지를 위한 비상 시국기도회'를 가졌다.

언론악법저지를 위한 비상시국기도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약 200여 명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참여하였으며, 비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운데에도 기도회가 끝날때까지 자리를 지켜주었다.

총회 교회사외위원회 위원장 김종맹 목사와 위원들, 총무 배태진 목사 등은 기도회에 앞서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를 방문하여 '언론악법 저지를 위한 비상시국기도회'를 여는 기장의 입장을 전했다. 한나라당과 국회의장에게도 기장의 입장을 전달할 예정이었으나 일정 등이 맞지 않아 직접 전달하지는 못했다.참가자들은 민주언론을 위해, 서민 생존권을 위해, 4대강 살리기 위해 등의 제목으로 기도를 했으며 김경재 교수(기장생태운동본부 상임대표)의 설교를 통해서 미디어 법이 왜 언론 악법이 될 수밖에 없는지, 이 시대 기독교인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언론노조위원장 최상재, 언론노조 mbc 이근행 지부장 등의 연대발언이 있었으며 선언서낭독 등이 이어졌다 (선언서의 전문은 하단에 있음). 비상시국기도회의 이모저모를 사진으로 알리고, 8월 회보에 자세한 내용을 전하기로 한다.

상속의 담보

상속의 담보

2009년 7월 12일 설교

서울교회 www.seoulch.kr

배안용 목사 2009년7월5일 설교

에스겔서2:1~5, 고린도후서12:7~10, 마가복음서6:1~6

예수님도 어쩔 수 없어요.

홈페이지

http://www.seoul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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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홈페이지 셋팅

제5회 한일청소년연합수련회

2008년 서울교회 은혜의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