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일

어디에 힘쓸까?

2008년 11월 2일
어디에 힘쓸까?
전도서 3:9~14, 골로새서 1:9~12, 마태복음 9:18~26

1. 구상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3:11).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전3:9). 방금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지도자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자는 예수에게 상식을 넘어서는 기적을 바란다(마9:18~26). 그러나 예수 앞에 상식은 깨지고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달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자(골1:9). 그래서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신 하나님께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자(골1:12).
2. 설교
요즘 경기가 어렵고, 살기가 힘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살기가 힘들 때, 더 이상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주님, 그러면 이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죠?’
반대로, 내가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아서 이제는 내가 과거에 살던 방식을 청산하고, 새 각오가 생길 때 우리는 질문한다. ‘주님, 제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죠?’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내가 스스로 억지로 열려고 한다. ‘나는 이 길로 너무 가고 싶어!’ 그러나 그 순간에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길을 놓치고 만다.
전도서에는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하는 탄식이 나온다. 전도서 3:10에 보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14절에서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결론 내린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며 두려워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비추어 내가 지금 가는 길이 합당한 길인가? 아니면 내가 이제 행하려는 일이 옳은 일인가? 여러모로 심사 숙고해 보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해야 한다.
한 지도자가 예수에게로 와서 무릎을 꿇고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신다면, 내 딸이 살아날 것입니다.’하고 말한다. 예수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따라 나선다. 그런데 그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댄다. 혈루증은 피가 엉키고 뭉쳐서 곱사가 되는 병이라고 한다. 꼽추가 되면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것이나 같으니 여인의 절실함이 얼마나 컷을 지는 짐작이 간다. 예수는 그 여자가 보인 초조한, 어쩌면 미신적이지만 그러나 모험적인 신뢰, 모든 장애를 극복하는 그 신뢰를 믿음이라고 부르시면서, 혈루증 앓는 여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그의 몸에 영향을 일으킨다.
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과 같은 구절인 마가복음 5:34에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며 구원과 평화를 준다. 하지만 마태는 옷술에 손을 대기만 하는 것으로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은 오해라며, 구원의 이유가 ‘그 여인의 믿음의 힘과 예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마9:22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말하는 ‘바로 그 때’를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마태를 따라 미신적이지만, 무언가 해야만 되겠다는 이 혈루증 앓는 여인의 구원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전도서의 운명을 거스르는 새로운 사건이 생긴다. 바로 혈루증 앓는 여인이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사실 그렇게 따져보면 딸이 죽은 지도자 한 사람은 예수를 찾아와 자신의 죽은 딸에게 손을 얹어 달라는 부탁이다. 예수가 집에 도착했을 때, 장례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피리를 부는 사람과 떠드는 사람들로 시끌벅적 하다. 예수는 죽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자기를 비웃는 무리들을 모두 내보낸 다음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소녀가 벌떡 일어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믿음이니 구원이니 평화니 하는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오는데, 죽은 소녀를 살리는 이 경이로운 일에 대해서는 마태는 아무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구절인 마가복음 5:41에는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도 믿음, 구원, 평화에 관한 말씀은 없으시다. 다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거라 하신 것이다.
예수는 이미 죽은 운명과 아직 죽지 않은 운명에 대해 말씀하시려고 가시는 중에 기필코 주의 은혜를 입어야겠다는 혈루증 여인을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죽지 않은 운명에 대해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고, 자신의 운명을 딛고 절실히 주를 만나 옷술이라도 만져야겠다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구원을 약속하시며, 앞으로 평화롭고 건강하게 살라고 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9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 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언제나 길이 열려 있다. 하나님의 뜻에는 이미 드러난 뜻과 감추어진 뜻이 있다. <계시>는 명백하게 이미 알 수 있도록 이미 드러난 뜻인데,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계명이 곧 계시다.
그러나 <섭리>는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열심히 협력하여 아버지의 선한 섭리적 뜻이 내 인생을 통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의 일방적 결정이나 제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밝혀 주시려는 자비의식이며(히 12:5-6) 허물과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달려가는 성도들의 발길을 제어하시려고 밟아 주시는 긍휼의 ‘브레이크’이다. 어거스틴도 그의 ‘참회록’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시어 적당히 우리에게 유익한 시련과 고통을 주시어 다시 주님에게 돌아오도록 부르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넘어졌는가, 왜? 브레이크가 걸렸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기 보다는, 이미 나타나 있는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항상 제시되어 있고, 그 길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의 진실이 자기 앞에 추악하게 나타났을 때, 비로소 객관성 있게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참회하게 된다. 베드로가 자기자신에 대해 너무 처참한 모습을 본 나머지 울었다고 한 부분이 있다. ‘아, 이게 나였구나!’ 겉으로 보여진 자신의 입술은 죽는데 까지 따라 가겠다고 호언장담 했는데, 남들 눈에 감춰진 자기의 본래 입술은 그리스도를 모른다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를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가 발견한 길은 자신을 사랑하셔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자신의 올바른 길이었다.
이런 올바른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지식이 필요하다. 어떠한 지식인가? 우리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학교를 다녔으며, 매일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신문을 보거나 방송을 듣는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명쾌하게 주는 것은 없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 기도한다고 한다.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도록 해야겠다. 오늘 우리 일생의 길에서 주님 내려주시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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